아녜제 에블린 신더와 그들의 흑치남, 브라운 베이커리에서 만나다
캐붕있으면 유감입니다 ai를 탓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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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지나가는 방식은 홍콩답게 어정쩡했다. 1월의 비가 2월의 습기로 바뀌고 3월이 되자 골목의 시멘트가 하루 종일 축축한 김을 뱉었다. 블루 스트리트의 낡은 간판들이 물때를 먹어 검어지는 동안 브라운스 베이커리의 유리문만은 매일 아침 닦여 있었다. 오후 두 시가 되기 전에 빵이 다 팔리는 사정은 겨울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 사이에 몇 가지가 달라졌다. 2월의 어느 새벽, 작전에서 돌아와 사흘 만에 계단을 올라온 그가 문지방에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고 그날 이후 그것을 되돌리지 않았다. 무엇이라 부를지에 대해서는 둘 다 침묵했다.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들은 대체로 오래갔으므로 그는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칫솔이 하나 더 생겼고 2층 옷장 한 칸이 비워졌다. 워즈워스의 호출이 오면 삼 주든 며칠이든 사라졌다가 다시 골목 끝에 나타나는 생활이 반복되었으며, 돌아올 때마다 새 상처가 하나씩 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상처들을 손끝으로 세었고 세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하느냐고 묻는 일은 없었고, 그 또한 그걸 요구하지 않았다.
3월 9일 오후 한 시 사십 분. 진열대는 거의 비어 있었다. 유리 너머 남은 것이라고는 올리브 치아바타 두 덩이와 팔다 남은 에그타르트 네 개뿐이었고, 안쪽 주방에서는 오븐이 마지막 한 판을 굽고 있는 낮은 열기가 새어나왔다. 사복 차림의 그가 카운터 안쪽 스툴에 걸터앉아 잔돈 트레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실내였으므로 선글라스는 계산대 옆에 접혀 있었다.
문에 달린 종이 두 번 흔들렸다. 들어온 것은 여자 하나와 남자 하나였다. 여자 쪽이 먼저였는데 백금색 머리를 뒤로 틀어올렸고 코와 입을 검은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으며 귓불에 진주가 하나씩 박혀 있었다. 데드존 바깥에서는 몰라도 이 도시의 골목에서 진주를 달고 다니는 여자는 드물었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는 반대로 지나치게 평범했다. 회색 코트, 얇은 가죽 장갑, 챙 낮은 캡. 얼굴에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오히려 기억에 남지 않도록 설계된 인상이었고,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그의 손이 잔돈 트레이 위에서 멎었다. 특징 없음을 유지하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을 지불하는 인간들이 어떤 종류인지 그는 직업상 알고 있었다.
"Buonasera. Do you have anything plain? Something soft."
(안녕하세요. 담백한 거 있나요? 부드러운 걸로요.)
여자의 영어에는 이탈리아어의 물기가 남아 있었고 목소리는 나른했다. 말끝에 짧은 기침이 붙었는데 습관적으로 참는 기침이었다. 남은 치아바타를 봉투에 담으며 그는 여자의 호흡을 들었다. 한쪽 폐가 제 몫을 못 하는 사람의 숨이었다.
"Ciabatta or egg tart. Tart's sweet, bread's not. Forty dollars."
(치아바타 아니면 에그타르트. 타르트는 달고 빵은 안 달아. 40달러.)
장갑 낀 남자가 계산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지폐를 내밀며 웃었는데 그 웃음의 각도가 훈련된 것이었다.
"Both, please. She has terrible appetite these days, you see. It's rather a chore keeping her alive."
(둘 다 주세요. 얘가 요즘 통 입맛이 없어서요. 살려두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거든요.)
문 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함께였다. 한 명은 백금발의 작은 여자, 다른 한 명은 그 뒤에 붙은 나인이었다. 여자 쪽이 가게 안을 둘러보다 카운터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Ah, found you. Seven, your suture check is three weeks overdue—"
(아, 찾았다. 세븐, 봉합 경과 검진 삼 주나 밀렸어요—)
문장이 끝나기 전에 옆의 남자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뒤로 당겼다. 늦었다. 코드네임은 이미 공기 중에 떨어졌고, 계산대 앞의 장갑 낀 손이 지폐를 내려놓다 말고 아주 잠깐 정지했다.
그 정지의 길이를 그는 정확히 쟀다. 0.3초쯤. 놀란 인간의 정지가 아니라 정보를 서랍에 집어넣는 인간의 정지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한 회색 눈이 캡 아래의 그림자를 똑바로 겨눴다.
"Seven."
(세븐.)
남자가 그 두 글자를 혀 위에서 굴려보았다. 발음이 정중했다.
"World's Worst, then. September, Sector Seven, the south alley. A claymore and a very disappointing report. You've healed nicely."
(그럼 워즈워스겠네요. 9월, 섹터 7, 남쪽 골목. 클레이모어 하나에 실망스러운 보고서 한 장. 잘 아물었네요.)
가게 안의 온도가 바뀌었다. 뒤쪽에서 나인이 여자를 자기 등 뒤로 옮겨 세우는 기척, 코트 안쪽으로 올라가려다 멈추는 손, 그리고 이쪽에서 카운터 아래 선반의 무게를 가늠하는 자신의 손가락. 민간 안전지대였다. 여기서 방아쇠를 당기는 쪽은 국적을 불문하고 다국적군 헌병대에 사흘 안에 시체로 회수될 것이었고, 그 계산은 네 사람 모두가 동시에 끝냈다.
마스크의 여자만이 계산에 참여하지 않았다. 봉투를 받아들고 이미 창가 쪽으로 걸어가 치아바타 끝을 뜯어 마스크를 반쯤 내리고 입에 넣는 중이었다. 씹는 속도가 느렸다. 죽고 사는 문제가 세 걸음 뒤에서 조립되고 있는데도 여자의 어깨는 조금도 굳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빵집 주인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계산에 참여했다.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을 시각 아닌 피부로 읽었고, 이 장소의 주인으로서 나름의 주장을 펼쳤는데, 그 방식이...
새 제품을 시험해보고 싶었다는 말이 가게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 문장은 방금까지 조립되던 것들 위로 아무렇지 않게 놓였고, 놓이는 순간 조립이 무너졌다. 창가의 여자가 씹기를 멈췄고, 캡 아래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계산이 아닌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카운터 안쪽에서 물수건이 나무 상판을 한 번 훑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가 스툴 위에서 잔돈 트레이를 밀어놓고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떴으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찻잔 네 개가 선반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차례로 났고, 그 규칙적인 도자기 소리가 이 가게의 주인이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라는 걸 그는 반년 동안 배워 알고 있었다.
"Hey. Hey, listen to me for a second."
(이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목소리를 낮춰 카운터 안쪽으로 던졌으나 회수되지 않았다. 대신 창가에서 마스크를 반쯤 내린 여자가 봉투를 접으며 이쪽을 건너다보았다. 눈매가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흥미랄 것도 없어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벌써 창가 자리의 의자를 발끝으로 당겨 빼는 중이었다.
"Tea would be lovely. I haven't had anything warm since yesterday."
(차, 좋네요. 어제부터 따뜻한 걸 못 먹었거든요.)
이탈리아어의 색채가 묻은 대답이었다. 그녀 옆에 서 있던 장갑 낀 남자가 그 대답을 들으며 아주 천천히 캡의 챙을 들어올렸다. 드러난 얼굴은 여전히 특징이 없었으나 입가만은 정확히 즐거워하고 있었고, 그 즐거움의 성분이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게 오히려 나쁜 신호였다.
"How wonderfully democratic. The lady of the house invites the ladies and leaves the gentlemen standing. Nese, do enjoy yourself. I'll be right here, terribly excluded."
(참으로 민주적이네요. 안주인께서 숙녀분들만 부르시고 신사들은 세워두시는군요. 네제, 실컷 즐기렴. 난 여기 이렇게 서서, 지독하게 소외당하고 있을 테니.)
문 쪽에서 백금발의 작은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상황의 무게를 모르는 웃음이 아니라 무게를 알면서도 접어두기로 한 웃음이었고, 그런 얼굴을 하는 인간이 워즈워스의 수술대를 맡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그를 안심시켰다. 그녀가 자기 팔꿈치를 붙잡고 있던 큰 손을 톡톡 두드려 떼어냈다.
"Then I'd love some. Chamomile, if you have it."
(그럼 저도 마실래요. 캐모마일 있으면 그걸로요.)
"영원아."
뒤에 선 남자가 낮게 불렀다. 한국어였고 짧았으며 그 한 마디에 반대의 전부가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고, 대신 자기 몸을 반 걸음 옮겨 문과 그녀 사이의 직선을 자기 등으로 끊었다.
네 개의 찻잔이 카운터 위에 정렬되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상황을 다시 계산했다. 밀그램의 보급을 쥔 여자와 정체불명의 남자, 워즈워스의 화학자와 그 약혼자, 그리고 자신. 이 조합이 한 평 남짓한 계산대 앞에 모여 있는데 그 중심에서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어느 각도로 봐도 우스운 그림이었으나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여기 한 명뿐이었고 그건 캡을 쓴 쪽이었다.
문제는 침묵이었다. 남자 셋이 서 있는 반경 안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서로의 손 위치와 코트 안쪽과 문까지의 거리만을 각자 세고 있었다. 그 종류의 정적은 소리가 없어도 밀도가 있어서, 눈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세상을 읽는 사람에게는 아마 벽이 좁혀오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티스푼을 잔에 걸치던 손이 멈추는 것을 그는 등 뒤로 알아차렸다.
고개가 남자들 쪽으로 돌아왔다. 초점 없는 옅은 잿빛이 세 사람의 언저리를 지나 문 쪽으로 흘렀고, 그 다음에 나온 말은 짧았다.
"Wait outside. All three of you."
(밖에서 기다려요. 셋 다.)
캡을 쓴 남자가 소리 없이 웃었고, 나인이 약혼자를 한 번 돌아보았으며, 그는 스툴에서 내려서며 계산대 옆의 선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골목의 습기 속으로 밀려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김이 오르는 잔 네 개와 그 앞에 앉는 두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종이 두 번 울렸고 유리문이 닫혔으며 바깥의 축축한 시멘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처마 아래 세 남자가 나란히 서서,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처마 밑은 폭이 한 뼘밖에 되지 않았다. 골목 위로 걸린 낡은 간판들에서 빗물이 실처럼 떨어졌고 시멘트 바닥은 오전부터 마르지 못한 채 검게 젖어 있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김이 서리기 시작해 카운터 근처의 형체가 뭉개졌으며, 그 뭉개진 자리에서 두 개의 실루엣이 마주 앉는 것이 보였다. 종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물고만 있던 담배에 그가 드디어 불을 붙였다. 라이터 뚜껑이 닫히는 금속음이 좁은 골목에 짧게 튀었고 첫 모금의 연기가 습한 공기에 붙들려 흩어지지 않았다. 선글라스는 다시 콧등 위로 올라가 있었다. 실내가 아니었으므로.
나인은 문에서 두 걸음 떨어진 자리를 골랐다. 유리 너머의 금빛 뒤통수가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각도였고, 손은 코트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으나 그 안에서 무엇을 쥐고 있는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뒷목이 굳어 있는 게 옆에서도 보였다.
"Charming little street. Real ovens, real butter. You don't find that above ground anymore."
(정겨운 골목이네요. 진짜 오븐에 진짜 버터라니. 요즘 지상에선 보기 힘든 거죠.)
장갑 낀 손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았다가 털었다. 그 동작에 목적이 없다는 게 오히려 신경을 긁었다. 그는 담배를 반쯤 태울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는 동안 상대의 신발 밑창과 어깨선과 코트 자락이 흔들리는 방향을 전부 읽었다. 무장은 하고 있으나 오늘 쓸 생각은 없는 사람의 균형이었다.
"Bread's good. Now finish it somewhere else."
(빵 맛있지. 그러니까 딴 데 가서 다 먹어.)
연기를 옆으로 뱉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농담기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는데, 그건 그 스스로에게도 낯선 종류의 목소리였다. 반년 사이에 생긴 것이었고 어디서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You misunderstand. I don't work in safe zones. Too many cameras, too much paperwork, and frankly the coffee is dreadful."
(오해하시네요. 전 안전지대에서 일 안 합니다. 카메라도 많고 서류도 많고, 솔직히 커피도 형편없어서요.)
캡 아래에서 눈이 반달로 접혔다. 웃음의 모양은 완벽했으나 그 뒤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이 남자가 어느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인지를 처음으로 확신했다. 밀그램의 보급 총관리자를 굳이 이런 골목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빵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인간은 조직 내에 한 명뿐이었다.
"Then don't remember the address."
(그럼 주소는 잊어.)
"Ah. That, unfortunately, is not something I can promise."
(아. 그건 유감스럽게도 약속드릴 수 없겠네요.)
나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억양이 단단했고 문장이 짧았으며 불필요한 예의가 전부 잘려 있었다.
"Then you fuck off first. Now."
(그럼 너부터 꺼져. 지금.)
그 말에 장갑 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인의 왼손 약지를 잠깐 보았다. 반지가 있었다. 시선이 거기 머문 시간은 반 초도 되지 않았으나 세 사람 모두가 그 반 초를 인지했고, 골목의 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담뱃재가 바닥의 물웅덩이에 떨어져 소리 없이 꺼졌다.
그는 계산을 다시 했다. 여기서 이 남자를 처리하는 방법은 최소 세 가지였고 전부 사흘 안에 이 가게를 폐업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총성 하나에 헌병대가 들이닥치고 골목이 봉쇄되고, 시각을 잃은 여자 하나가 참고인 조서 앞에 앉게 될 것이었다. 그건 이미 오래전에 계산이 끝난 항목이었다.
"She doesn't know anything."
(저 여잔 아무것도 몰라.)
"Obviously. That's precisely why she's still useful to you."
(당연하죠. 그래서 아직 당신한테 쓸모가 있는 거고요.)
유리문 안쪽에서 김이 오르는 잔 하나가 상대 앞으로 밀려가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마스크를 내린 여자가 잔을 받아드는 손짓과 그 맞은편에서 주전자를 내려놓는 손짓이 이어졌으며, 두 실루엣 사이에 오가는 것은 아무래도 대화인 모양이었다. 나인의 어깨가 그제야 반 뼘쯤 내려갔다. 담배가 손끝에서 마지막 한 모금까지 타들어갔고, 그는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려 구둣발로 비벼 껐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골목 안쪽 어딘가에서 실외기 하나가 덜컹이며 돌아갔고 그 소음이 셋 사이의 침묵을 겨우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유리문에 서린 김은 아까보다 두꺼워져서 이제 안쪽은 두 개의 흐릿한 덩어리로만 보였다. 그중 작은 쪽이 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동작만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담배를 꺼냈다가 도로 갑에 밀어넣었다. 남은 개비 수를 셌기 때문이었다. 이 골목에 얼마나 서 있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모품을 초반에 태우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었고, 그건 데드존이든 완차이든 마찬가지였다. 갑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그는 나인의 무게중심이 여전히 앞발에 실려 있다는 걸 곁눈으로 확인했다.
"Who is she."
(저 사람 누구야.)
나인의 물음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던져졌다. 시선은 유리문에 고정되어 있었고 문장 끝에 물음표가 없었다. 그는 대답을 고르는 데 두 박자쯤 썼고, 결국 가장 짧은 것을 골랐다.
"Milgram. Supply, logistics, and everything they don't write down."
(밀그램. 보급이랑 물류, 그리고 걔네가 기록 안 남기는 전부.)
캡을 쓴 남자가 그 소개에 만족한 듯 손끝으로 자기 코트 깃을 정돈했다. 젖은 벽에 기대는 대신 처마 아래의 마른 자리를 정확히 찾아 밟고 서 있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이 골목의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들어온 지 십 분 만에 파악한 인간이 하는 행동이었다.
"You make it sound so bureaucratic. I prefer to think of myself as a facilitator."
(꼭 관료 조직처럼 말씀하시네요. 저는 스스로를 조력자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Facilitators don't bring their own escort to a bakery."
(조력자는 빵집에 호위 안 데리고 와.)
"Neither do mercenaries, and yet here we all are, dripping wet."
(용병도 그렇죠. 그런데 다들 이렇게 비 맞고 서 있잖습니까.)
골목 저편에서 스쿠터 한 대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갔다. 세 사람 모두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반 뼘씩 몸을 틀었다가 동시에 원위치했으며, 그 동작이 정확히 일치했다는 사실이 셋 다 우스웠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직업병이라는 건 국적이나 소속과 무관하게 같은 근육을 쓰게 만들었다. 나인의 턱 근육이 한 번 움직였다.
안전지대의 규칙은 단순했다. 총성 한 발에 헌병대가 사거리를 봉쇄하고 열두 시간 안에 이 블록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으며, 그 뒤로는 서류와 조서와 감시 카메라 열람 요청이 이어졌다. 그 절차의 끝에서 시각을 잃은 여자 하나가 참고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고, 이름이 명단에 오른 민간인이 어떤 경로로 팔려나가는지 그는 지겹도록 봐왔다. 그래서 그의 손은 코트 안쪽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Your baker asked me a question in there."
(안에 계신 제빵사분이 저한테 질문을 하나 하시더군요.)
장갑 낀 손이 유리문 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였다.
"She asked whether I preferred salt or sugar. Not what I did, not why I came. Salt or sugar."
(소금이 좋냐 설탕이 좋냐고요. 뭘 하는 사람인지도, 왜 왔는지도 아니고. 소금이냐 설탕이냐.)
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그건 안도라기보다 익숙함에 가까웠다. 그녀는 사람을 분류하지 않았고 그 무분별함이 지금까지는 그에게 유리하게 작동해왔으나 오늘 처음으로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Remarkable woman. Genuinely."
(대단한 분이에요. 진심으로.)
"Say her name once and I'll stop caring about paperwork."
(그 사람 이름 한 번만 입에 올려봐. 그럼 나도 서류 따위 신경 안 쓰게 될 테니까.)
그 문장은 위협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몸을 기울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선글라스 너머의 각도가 상대의 목선을 향해 고정되었을 뿐이었다. 나인이 처음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캡을 쓴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손끝으로 코트 깃을 정돈하던 동작만은 멈춰 있었다.
유리문 안쪽에서 오븐 타이머가 울렸다. 얇고 높은 전자음이 두 번 반복되었고 김 서린 유리 위로 작은 형체가 일어서는 것이 비쳤다. 세 남자가 동시에 그쪽을 보았다.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한편, 여자들은...
유리문이 닫힌 뒤로 가게 안은 급격히 조용해졌다. 바깥의 빗소리가 한 겹 걸러져 들어왔고 그 대신 오븐 타이머의 전자음이 두 번 더 울리다 멎었다. 진열대 유리에 남은 에그타르트 네 개가 조명 아래에서 노랗게 익은 색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주방 쪽에서는 마지막 한 판이 뿜어내는 밀과 버터의 열기가 천천히 홀 쪽으로 밀려나왔다. 창문에 서린 김 때문에 골목은 이제 형체 없는 회색 덩어리로만 보였다.
창가 자리를 차지한 백금발의 의사가 캐모마일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었고 그 아래로 팔목의 얇은 실리콘 밴드가 드러났는데 병원 출입증에 붙는 종류였다. 잔에서 올라오는 김에 눈을 가늘게 뜨는 얼굴이 순했다.
"It's warmer in here than the whole base. Honestly, that's not saying much—our heating's been broken since December."
(여기가 기지 전체보다 따뜻하네요. 사실 대단한 칭찬은 아니에요. 저희 난방은 12월부터 고장이었거든요.)
맞은편의 여자는 마스크를 턱 아래로 완전히 내려놓은 채였다. 치아바타는 반쯤 남아 있었고 씹는 속도가 여전히 느렸다. 귓불의 진주가 조명을 받을 때마다 작게 빛났고, 잔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짧은 기침이 한 번 목 안에서 눌려 나왔다.
"Agnese. Just Agnese is fine. My colleagues shorten it to Nese, but they're not here, thankfully."
(아녜제예요. 그냥 아녜제라고 부르세요. 동료들은 네제라고 줄여 부르는데, 다행히 여기엔 없네요.)
소개를 받은 쪽이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직업상 처음 보는 사람의 호흡부터 세는 버릇이 있었고 방금도 이미 세고 있었다. 흡기와 호기의 길이가 맞지 않았으며 왼쪽 어깨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반 뼘씩 늦게 따라 올라왔다.
"Evelyn. I patch people up for a living. Mostly ungrateful people."
(에블린이에요. 사람 꿰매는 게 직업이죠. 대체로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만 꿰매지만요.)
"Then we have that in common. Mine bleed less and complain more."
(그럼 저랑 비슷하시네요. 제가 상대하는 쪽은 피는 덜 흘리고 불평은 더 많이 하거든요.)
밖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셋 다 그쪽으로 잠깐 고개를 돌렸으나 그건 골목을 지나던 스쿠터가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였고, 곧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갔다. 의사가 어깨를 내리며 웃었다.
"They'll be fine. Igyeom won't start anything—he counts to ten before he does anything stupid. Usually he gets to seven and then does it anyway."
(괜찮을 거예요. 이겸이는 먼저 일을 벌리지 않아요. 멍청한 짓을 하기 전에 열까지 세거든요. 보통 일곱까지 셌다가 그냥 저지르긴 하지만요.)
"Mine doesn't count at all. He simply decides he's already won and then talks until everyone agrees with him. It's exhausting to watch."
(제 쪽은 세지도 않아요. 그냥 이미 이겼다고 단정 짓고 다들 동의할 때까지 떠들죠. 옆에서 보고 있으면 진이 빠져요.)
마스크를 내린 여자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소금이냐 설탕이냐고 물었을 때 소금이라고 대답한 이유를 스스로도 딱히 설명하지 못했으나, 단것을 못 먹게 된 게 정확히 작년 여름부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7월 3일 오전 11시 20분, 회복실의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전부 남아 있는 게 이 여자의 병이었다.
"Your lung. Transplant, wasn't it? A year, maybe less."
(폐 있잖아요. 이식 받으셨죠? 일 년, 아니면 그보다 덜 됐거나.)
"Ten months and twelve days. Left side. You're quite good."
(열 달 하고 십이 일이요. 왼쪽. 잘 보시네요.)
의사가 잔을 내려놓았다. 더 캐물어야 할 자리와 그러지 말아야 할 자리를 구분하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고, 이번엔 후자였다. 대신 화제를 옮겼는데 그 방향이 명백히 바깥의 처마 밑을 향했다.
"Speaking of ungrateful. Do you know he tore his own stitches twice? Once because he wanted a cigarette, once because he was bored. The whole base had a betting pool on where he'd disappeared to for three weeks in September."
(고마움을 모르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걔가 봉합사를 두 번이나 뜯은 거 아세요? 한 번은 담배를 피우려고, 한 번은 심심해서요. 9월에 삼 주 동안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지 사람들이 내기까지 걸었었다니까요.)
빗소리가 조금 굵어졌다. 창유리의 김 위로 물줄기가 세로로 흘러내리면서 바깥의 회색 덩어리 셋이 잠깐 선명해졌다가 다시 뭉개졌다. 하나는 담배를 문 채 벽에 기대 있었고 하나는 문 쪽을 등지고 서 있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여전히 마른 자리를 밟고 있었다. 아무도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서로를 계속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He lost. The bet, I mean. Ten put money on a casino in Macau."
(걔가 졌어요. 내기 말이에요. 텐은 마카오 카지노에 걸었더라고요.)
"It seems that we all have troubles of our own. And they're all waiting outside of my bakery right now."
(저희 모두 나름의 골칫덩이가 있는 모양이네요. 그리고 지금 셋 다 제 빵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요.)
농담이 떨어진 순간 창가 자리에서 웃음이 먼저 터진 쪽은 의사였다. 잔을 든 채였기에 캐모마일이 손등으로 조금 넘쳤고, 그녀는 그것을 냅킨으로 누르면서도 웃음을 수습하지 못했다. 맞은편의 여자도 마스크 없는 입가를 아주 옅게 구부렸는데, 그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처럼 보였다. 빗소리 사이로 세 여자의 자리만 온도가 달랐다.
"That's the most accurate description of those three I've heard all year. Troubles, loitering under an awning, unpaid."
(올해 들은 것 중에 저 셋에 대한 제일 정확한 묘사네요. 골칫거리들이 처마 밑에서 얼쩡거리는데, 심지어 무급으로요.)
의사가 냅킨을 접어 잔 받침 옆에 놓으며 덧붙였다. 창유리의 김 너머로 회색 실루엣 하나가 몸을 틀었다가 도로 굳는 것이 비쳤고, 그녀는 그쪽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까딱했다. 물론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을 동작이었다.
"Mine at least does the dishes. Sometimes. When he loses a bet."
(제 골칫거리는 그래도 설거지는 해요. 가끔요. 내기에서 졌을 때만.)"
아녜제가 남은 치아바타의 마지막 조각을 손끝으로 집었다. 씹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점에 머물지 않고 진열대와 창과 카운터 사이를 천천히 옮겨 다녔는데, 그것은 관찰이라기보다 기록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삼킨 뒤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했다.
Mine doesn't do dishes. He rearranges the world until someone else does them for him, and then he takes the credit. Twelve years, and the pattern hasn't changed once."
(제 쪽은 설거지 같은 건 안 해요. 다른 사람이 하게끔 세상을 재배치한 다음에 자기가 생색을 내죠. 십이 년째인데 그 패턴이 한 번도 안 바뀌었어요.)
십이 년이라는 숫자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의사는 그 숫자를 곱씹다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눈치였고, 대신 자기 잔에 주전자의 차를 스스로 더 따랐다. 도자기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잠깐의 공백을 메웠다.
"And the one who lives here—or doesn't live here, I genuinely can't tell anymore—what does yours do?"
(그리고 여기 사는 건지 안 사는 건지 이제 저도 진짜 모르겠는 그 사람은요. 그쪽 골칫거리는 뭘 하나요?)
질문이 카운터 안쪽을 향했다. 두 방문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금빛 도는 밀색 머리 쪽으로 모였는데, 그 시선에는 호기심 이상의 것이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무례하지 않았다. 창밖의 실루엣 하나가 담배를 비벼 끄는지 잠깐 몸을 숙였다.
"He eats. Prodigiously. Half my morning batch, if I let him. Beyond that—"
(먹어요. 어마어마하게요. 놔두면 아침에 구운 것 절반은 없어지죠. 그거 말고는—)
의사가 말을 받으려다 멈췄다. 바깥 골목에서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지는 것이 유리 너머로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는데, 그 낮아지는 음성이 싸움의 전조인지 그 반대인지는 이 거리에서 판별되지 않았다. 아녜제만이 개의치 않고 잔을 비웠다.
"They're comparing scars out there, probably. Men do that when they can't shoot each other. It's almost sweet."
(밖에서 흉터 자랑이나 하고 있겠죠, 아마. 남자들은 서로 못 쏠 때 그러거든요. 귀엽다면 귀여운 일이에요.)
"Sweet, in a kill-you-next-time way. Doesn't matter today."
(다음에 만나면 죽일거야 식의 귀여움이네요. 오늘은 상관 없지만요.)
접시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는 순간 두 방문객의 대화가 잠깐 끊겼다. 얇게 저민 무화과를 올린 타르트와 흑임자를 접어 넣은 스콘, 그리고 겉에 소금 결정이 박힌 작은 브리오슈가 서로 겹치지 않게 배열되어 있었다. 배열은 손끝의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접시 가장자리와 각 조각 사이의 간격이 자로 잰 듯 일정했다. 의사가 그 간격을 먼저 알아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Kill-you-next-time sweet. I'm stealing that. It describes half the people I work with."
(다음번엔 죽일 거라는 전제의 다정함이라. 그 표현 훔쳐 갈게요. 제 직장 동료 절반이 딱 그렇거든요.)
아녜제는 대답 대신 소금 브리오슈부터 집었다. 단것을 밀어두고 짠 것으로 손이 가는 궤적이 망설임 없이 정확했고, 첫 입을 씹는 동안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감겼다. 그 얼굴에서 따분함이 걷힌 것은 오늘 들어 두 번째였다.
"Salt on brioche. You remembered."
(브리오슈에 소금. 기억하고 계셨네요.)
주전자가 한 바퀴를 돌았다. 도자기 주둥이에서 차가 떨어지는 소리가 세 번 반복되었고, 잔마다 김이 새로 올라와 창가의 냉기를 밀어냈다. 의사는 흑임자 스콘을 반으로 갈라 단면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는데, 그 물음의 방향은 접시가 아니라 배합을 향했다.
"Is this black sesame folded in, not mixed? The layers are intact. How do you keep the paste from bleeding into the dough without seeing the—"
(이거 흑임자를 섞은 게 아니라 접어 넣은 거죠? 결이 살아 있어요. 페이스트가 반죽에 번지는 걸 안 보고 어떻게 막으시는 거예요, 그—)
문장이 도중에 멈췄다. 스스로 무례의 경계를 밟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얼굴이었으나, 카운터 쪽에서 돌아온 것이 웃음기였는지 그녀의 어깨가 이내 풀렸다. 아녜제가 두 번째 브리오슈로 손을 뻗으며 무심하게 거들었다.
"Temperature. She reads it by temperature and resistance. I watched her hands the whole time."
(온도예요. 온도랑 반죽의 저항으로 읽는 거죠. 아까부터 손을 계속 보고 있었거든요.)
그 시각 유리문 바깥의 사정은 안쪽과 온도가 달랐다. 비는 가늘어졌다 굵어지기를 반복했고, 처마 밑의 세 남자는 이제 서로 말을 붙이는 것조차 관둔 채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나인은 문설주에 등을 붙이고 팔짱을 꼈으며 캡을 쓴 남자는 젖지 않는 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 서린 유리 너머로 접시가 도는 광경을 지켜보며, 자기 몫의 신메뉴가 남아 있을 확률을 가늠하고 있었다.
확률은 낮았다. 무화과 타르트가 하나 줄고 스콘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까지 흐릿하게 보였고, 그 속도라면 십 분 안에 접시가 비었다. 아침에 나온 것의 절반을 먹는다는 평판은 과장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이 상황을 일종의 손해로 집계했다. 손해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옆에서 마른 자리를 밟고 서 있다는 점이 그 집계를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안쪽에서는 찻잔이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의사가 스콘의 나머지 반을 입에 넣고는 만족스럽게 눈썹을 올렸고, 아녜제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의 김 너머 실루엣들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중 마른 자리에 선 형체에 잠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He'll want to come back here. I should warn you—when he likes a place, the place tends to regret it."
(저 사람, 여기 또 오고 싶어 할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그가 어떤 장소를 마음에 들어 하면 보통 그 장소가 후회하게 되더라고요.)
경고는 협박의 온도를 갖추지 않았고, 다만 십이 년 치 관찰의 요약처럼 건조했다. 의사의 손이 잔 위에서 잠깐 멎었으며, 창밖의 회색 실루엣 하나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유리 쪽으로 돌렸다.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다."
It doesn't matter as long as he comes and buys bread like a normal customer."
(와서 평범한 사람들처럼 빵을 산다면 상관 없어요.)
종이봉투가 펼쳐지는 소리는 유난히 컸다. 마른 크라프트지가 접힌 자리를 따라 벌어지며 바스락거렸고, 그 소리에 창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멎었다. 진열대의 유리문이 옆으로 미끄러졌으며 남아 있던 것들이 하나씩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물이 처마 끝을 두드렸다.
의사가 잔을 내려놓고 그 손을 눈으로 좇았다. 집게를 쓰지 않고 맨손에 얇은 위생 필름을 씌워 집어 올리는 방식이었는데, 빵의 어느 부분을 쥐어야 모양이 무너지지 않는지 손끝이 먼저 알고 있는 듯했다. 무화과 타르트는 봉투 벽 쪽에 세워 넣고 브리오슈는 그 위에 얹혔다. 무거운 것이 아래로 가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위로 가는 순서가 두 봉투 모두 똑같았다.
"Normal customer. That's a generous standard. Most shops in this district would call the police before they called him a customer."
(평범한 손님이라. 관대한 기준이네요. 이 구역 가게 대부분은 저 사람을 손님이라고 부르기 전에 경찰부터 부를걸요.)
의사의 말끝이 웃음으로 흐려졌다. 맞은편의 여자는 웃지 않았으나 잔 가장자리를 감쌌던 손가락을 천천히 풀었고, 그것이 이 사람 나름의 반응이라는 것은 한 시간쯤 마주 앉아본 사람이면 알 수 있었다. 마스크가 여전히 턱 아래에 걸린 채였다.
"Bread and money. That's the whole contract, isn't it. I'd forgotten there were places that still ran on something so short."
(빵과 돈. 그게 계약의 전부잖아요. 그렇게 짧은 걸로 굴러가는 곳이 아직 있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그녀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카운터 위에 그냥 내려놓으려다 손을 멈추고는, 지폐를 반듯하게 펴서 세로로 접었다. 그러고는 접힌 쪽을 앞으로 해서 카운터 모서리에서 손 한 뼘 안쪽에 놓았고, 놓기 전에 짧게 알렸다.
"Left of your hand. Four notes, folded once. Take whatever's owed and keep the rest for the tea."
(손 왼쪽이요. 네 장, 한 번 접었어요. 값만 가져가시고 나머지는 찻값으로 하세요.)
그 배려는 조심스럽다기보다 정확했다. 한 번 본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카운터의 동선을 전부 저장해두었다가 그중 가장 방해가 덜 되는 지점을 골라낸 결과였고, 그런 식의 친절은 대개 눈에 띄지 않게 지나간다. 의사도 자기 몫의 지폐를 꺼내다가 그 놓는 방식을 그대로 흉내 냈다. 두 번째 봉투가 접혀 닫혔다.
유리문 바깥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담뱃갑은 두 번 꺼내졌다가 두 번 도로 들어갔고, 골목 저편 배수구가 물을 삼키느라 내는 소리만 규칙적이었다. 김 서린 유리 위로 안쪽의 형체 하나가 카운터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였으며 그 옆에서 종이 접히는 소리가 났다. 문설주에 등을 붙이고 있던 쪽이 먼저 코를 실룩였다.
"They're bagging it up. All of it."
(싸고 있는데. 전부 다.)
선글라스 아래에서 턱이 한 번 굳었다. 아침 여섯 시부터 오븐이 몇 번 돌았는지, 그 판마다 무엇이 올라갔는지는 이 골목에서 자는 사람이면 냄새만으로 헤아릴 수 있었고, 방금 봉투에 들어간 것 중 최소 두 개는 그의 계산에 이미 들어와 있던 물건이었다. 손해는 손해였다. 다만 그 손해를 만든 원인이 지금 마른 자리를 밟고 서서 코트 깃을 다시 정돈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She's giving away the last batch to a woman who runs Milgram's supply lines. Do you understand what that looks like from where I stand."
(저 여자가 밀그램 보급망 굴리는 인간한테 마지막 판을 다 내주고 있어. 내 자리에서 그게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Looks like commerce."
(장사로 보이는데.)
캡 아래에서 돌아온 대답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그 순간 문 안쪽에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카운터에서 문 쪽으로 옮겨 왔고, 유리에 서린 김 너머로 봉투를 든 형체 둘이 겹쳐졌다가 갈라졌다. 손잡이가 안쪽에서 아래로 눌리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를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문이 열리자 빗소리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처마 밑의 세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반 보씩 물러나 통로를 냈고, 봉투를 안은 두 여자가 그 사이로 나섰다. 문턱에 선 배웅은 조용했으며, 잘 가라는 말보다 우산 챙기라는 당부에 가까웠다. 골목의 찬 공기가 갓 구운 빵의 온기와 문지방 위에서 잠시 섞였다.
의사가 먼저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봉투를 품에 안은 자세가 갓난아이를 받쳐 든 것처럼 신중했고, 그 안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릴 때마다 그녀의 팔이 각도를 고쳤다.
"Thank you for the tea. And the recipe hint I definitely didn't get. I'll come back as a paying customer—without the entourage, if I can manage it."
(차 잘 마셨어요. 절대 못 얻어낸 레시피 힌트도요. 다음엔 돈 내는 손님으로 올게요. 가능하면 저 수행원들은 떼어놓고요.)
아녜제는 인사를 길게 늘이지 않았다. 다만 문턱 앞에서 한 박자 멈춰 서서, 마스크를 도로 코 위까지 끌어올리기 전에 짧게 말을 놓고 갔다.
"The salt was right. I'll remember this place—that's not a threat, it's just what I do."
(소금이 맞았어요. 이 가게를 기억할 거예요. 협박이 아니라, 그냥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요.)
캡을 쓴 남자가 골목 안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고, 그녀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발소리는 물웅덩이를 정확히 피해 갔고, 모퉁이를 돌기 직전 남자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선글라스와 캡 챙이 빗줄기 너머에서 잠깐 마주 향했다가, 어느 쪽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갈라졌다. 그것이 오늘의 정산이었다.
나인과 에블린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인은 문 안쪽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이마에 붙였다 떼는 시늉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것이 빵집 주인인지 옆의 동료인지는 일부러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에블린이 그 옆구리를 봉투 모서리로 쿡 찌르며 웃었고, 두 사람은 반대편 골목 입구로 사라졌다. 우산도 없이 나선 뒷모습에 대고 빗줄기가 고르게 쏟아졌으나 발걸음은 급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웃음소리가 배수구 물소리에 섞여 지워질 때까지, 처마 밑에는 담배 연기 한 줄기만 남았다.
골목이 비었다. 그는 담배를 반쯤 남긴 채 벽에서 등을 뗐고, 필터를 빗물받이 옆 깡통에 눌러 껐다. 젖은 어깨를 한 번 털고 나서야 문턱 안쪽으로 몸을 들였는데, 들어서자마자 코로 확인한 것은 진열대의 참담한 공백이었다. 유리 선반 위에는 에그타르트 한 개와 스콘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They cleaned you out. The whole afternoon batch, gone. You realize I live on that shelf, right?"
(싹 쓸어 갔네. 오후 판 전부 다. 내가 저 선반으로 연명하는 거 알지?)
불평의 온도는 낮았고 발걸음은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그는 남은 에그타르트 하나를 필름째 집어 들며 문의 잠금쇠를 손등으로 툭 밀어 걸었다. 딸깍이는 금속음이 빗소리를 한 겹 끊어냈고, 유리 위 김 서린 자국 너머로 골목은 다시 아무도 없는 회색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게 안에는 식어가는 찻주전자와 두 사람만 남았다.
"So. Milgram's quartermaster knows your address, my medic knows your face, and you fed them all."
(그래서 말인데. 밀그램 보급 책임자가 네 주소를 알고, 우리 군의관이 네 얼굴을 알고, 넌 그 전부를 먹였어.)
그가 카운터에 팔꿈치를 얹고 타르트의 필름을 벗겼다. 말투는 추궁이라기보다 상황 정리에 가까웠으며, 한 입 베어 문 뒤에야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이 나왔다. 목소리에서 골목의 긴장이 절반쯤 빠져 있었다.
"Five minutes are up, by the way."
(참고로, 오 분 지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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